계몽에 대한 열망의 반영

 

『유년필독』은 중층적인 성격의 교재이다. 이는 대한제국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과 기존의 다른 독본류 교재와의 관련성, 그리고 필자 자신의 가치관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생긴 결과로 지금의 교과서와는 그 위상이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유년필독』은 그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서 밝혔듯이 초급자를 위한 독본류 교재이다.  하지만 당시의 여타 초급자용 교재와는 다르게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는데, 이는 필자의 민족의식과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결과이지만 한편으로는 을사늑약(1905) 이후 한반도의 불안한 정세와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교재에 수록된 역사적 인물들은 주로 명장(名將)이나 충신들이 많다. 을지문덕, 양만춘, 김유신, 강감찬, 김덕령, 임경업, 이순신 등등이 학자나 문필가(최치원, 손순효, 정약용)보다도 월등히 많은 수를 차지하며 그들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교재에는 배움에 대한 독려, 새로운 서구 학문에 대한 관심 등도 일부 실려 있다.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교육의 주도권을 일제에 빼앗긴 대한제국은 사회 각층의 지식인들이 현실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교육에 힘을 썼고 이러한 움직임이 ‘개화’와 ‘개혁’이라는 구체적인 모토로 사회 전반에 부각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 민간에서 출간된 교재들에는 계몽에 대한 열망이 반영되었고, 『유년필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근대 초기 독본류 교재들은 지금의 읽기 교과서와 같이 다양한 교육적 설계 속에서 출간되지 못했다. 지금도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교육 과정이 개편되고, 새로운 교과서들이 출간되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규정들이 신설되거나 개편되었고, 교과서 또한 학부를 비롯한 민간 각층에서 다양하게 출간되었다. 이는 교육에 대한 열망과 관심이 비교적 높았던 반면, 그 관심만큼이나 체계적인 기획과 행정이 부족했음을 의미하였다.

이 당시 보통학교 교육 과정에는 수신(修身)을 비롯하여 국어, 한문, 일어, 산술, 역사・지리, 도화(圖畵), 체조 등 다양한 과목이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교재들은 온전히 발간되지 못했고, 공립학교는 물론 사립학교에서조차도 학교 재량으로 다양한 책들을 교재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독본류 교재들은 단순히 읽기 제재의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역사・지리 교과서로, 때로는 수신과 창가 교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유년필독』 또한 교재 중간 중간에 창가가 나오고 지리 및 고사(古事) 등이 수록되었던 것이다.

수업 연한 또한 지금처럼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개인의 형편에 따라, 학교 사정에 따라 각각의 과정을 속성으로 마치기도 했고, 몇 년에 걸쳐 이수하기도 했다. 따라서 교재에 수록된 제재의 분량이 1시간 내지는 2시간 내에 마칠 수 있도록 간결하게 구성되었고, 구체적인 학습 활동이나 수업 목표 등은 교사의 재량에 맡겨졌다. 이러한 수업 방식은 기존의 서당식 교육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 다루는 내용과 환경이 근대적으로 바뀌었을 뿐 교육 방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