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본이라는 근대의 창()


일제강점기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지금처럼 책이 넘쳐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읽을 만한 글들을 모아서 엮은 ‘독본(讀本)’이 지식의 다이제스트로 인기를 끌었다. ‘독본’은 일제가 주도한 공교육 제도에서의 공적 교과서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대중들의 필요와 욕구에 의해 편찬된 민간 교과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총서는 2년전 출간되 3권과 색다른 점이 있다. 앞서 발간된 3권이 \\'좋은 문장\\'을 기준으로 선별된 문학의 전사를 보여준다면. 이번 4권은 다양한 기준으로 분기된 독분의 진화 양상을 문화사의 맥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하형의 『二十世紀 靑年讀本』은 청년층만을 대상으로 한 수양서에 가깝게 기획된 독본이고. 조한문교원회에서 엮은 『中等朝鮮語作文』은 근대 전화기 국문체 중심의 예문과 각종 작문이론. 수사법 등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박기혁의 『朝鮮語作文學習書』는 보통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만든 조선어 작문 교재로 실제 교육현장에서 사용된 것이다. 이명세의 『新體美文 時文편지투』는 편지만을 특화하여 묶었다.

이 네 권의 독본은 현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었을 뿐. 자료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고자 원본의 표기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연구자들이 자료집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만하거니와. 각주와 해제가 함께 달려 있어 일제강점기 사람들이 무엇을 읽었을까에 관심을 가졌던 일반 독자들의 호기심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네 권의 대표적인 독본에 실려 있는 글들이 여전히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지식과 교훈을 전달할 수 있을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볼 만하다.


근대 작문 교재의 분기와 진화


『중등조선어작문』(1928)은 근대 독본. 특히 작문 교재 성격의 텍스트로서는 뚜렷한 분기와 진화를 보여주는 책이다. 최남선의 『시문독본』(1916)에서 발원한 근대 독본의 흐름은 이태준의 『문장강화』(1940)에서 일대 장관을 이룬다고 할 때. 이 책은 이윤재의 『문예독본』(1931)과 함께 문학과 작문이라는 영역을 분할하며 독본 텍스트의 두물머리[兩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서의 저본이 된 동명의 『중등조선어작문』은 1928년 창문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강매의 이름으로 낸 판본과 표기상의 차이는 없으나 예문을 많이 추가해 약 90페이지 정도 양이 늘어난 형태다. 편집 주체로 명기된 ‘朝漢文敎員會’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교과서 『조선어급한문독본』을 가르치던 조선어 교원들이 일제 당국에 검정을 받기 위해 만든 단체가 아닌가 추측되는데. 강매(姜邁) 역시 여기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은 근대 전환기 여타의 작문서와 달리 국문체 중심의 예문과 각종 작문 이론. 특히 수사법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문 교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본문을 한글로만 표기하되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하거나 주요 어휘를 한자로 표기한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였는데.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한 경우라도 토씨만 한글로 표기하였고. 표기의 원칙 역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교과서용법에 맞게 기술하였다. 기본적인 작문의 원칙은 물론이고. 여러 문종의 소개와 설명. 그리고 당대 문인들의 것으로 구성한 모범 예문의 수록 등 오늘날 작문 교재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1931년 이윤재의 『문예독본』(1931)과 쌍벽을 이루는 텍스트라 부를 만하다. 본문만큼이나 짜임새 있게 서술된 예언(例言)도 이 책의 여러 특성과 목적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독본의 형성과 분화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내용적으로는 학생이나 생활인의 실제 글을 예문으로 활용하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 특징이지만 필진이나 내용적 특징을 종합해보면 이른바 주요 예문으로 최남선・이광수・이병기・권덕규의 글을 재수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1권 1과에 실린 최남선의 「공부의 바다」는 『시문독본』에 이미 수록되었던 것이며. 2권 4과에 수록된 노래 「잔디밧」. 3권 16과에 일기문으로 소개된 박지원의 국역고전 「심양까지」 역시 『시문독본』에 실렸던 것이다. 이처럼 이광수의 논설과 기행문. 최남선의 기행문과 시조. 권덕규의 논설과 전기문 등은 대부분 재수록의 형태로 많은 단원에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시문독본』(1916)에서 『문예독본』(1931)으로 이어지는 독본의 흐름과 어문민족주의의 계보를 살피는 데 유용하다.

흥미로운 것은 ‘조한문교원회’ 명의로 낸 1928년판에 추가된 내용이 대개 시조(時調)나 편지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조와 편지를 설명하는 단원이 추가되기도 했지만 상당량의 시조와 편지를 예문으로 넣은 탓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문민족주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점 외에도 당대 시조부흥운동의 양상이 반영되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