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그려내다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신말주의 후손이고,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신윤복은 영조 34년(1758 년)에 아버지 신한평(申漢枰, 1726~?, 호는 逸齋)과 어머니 홍천 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 이름은 가권(可權)으로 후에 윤복으로 개명하였다. 신윤복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으로, 암헌공 신장(申檣)의 다섯째 귀래정 신말주(申末舟, 신숙주의 동생)의 손자 신공섭의 다섯째 아들 신수진의 7세손이었다. 서자인 신수진의 후손들은 중인(中人) 신분이며 수십 명의 역관과 율관, 운관으로 활동했고, 신세담(종증조부)·신일흥(증조부)·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들이 나왔다. 

아버지 신한평은 도화서의 화원으로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정조 초기 그린 그림 중 한 그림이 알아볼 수 없다 하여 관료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당하기도 했으며, 관직은 첨절제사를 지냈고, 산수·인물·초상·화훼 등을 잘 그렸 다. 신윤복 역시 도화서의 관원으로 첨정과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신윤복은 인물화와 풍경화 외에도 많은 양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양반의 위선적인 태도와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연애와 애환을 묘사했으며 해학이 담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1800년 정조 사후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신윤복의 작품 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혜원이 남긴 작품은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데, 대략 1813년 이후에 사망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사망일과 사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요 작품으로는 ≪풍속도첩≫, <미인도(美人圖)> 등이 있다.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여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 또한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이러한 그림들은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주로 풍속화를 그렸으며, 산수화와 영모화(翎毛畵,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춘화 작품도 그렸다.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인물화에 있어서는 사람 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또한 중국과 서양 상인을 통해 들어온 안료들을 이용하여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채를 사용했다. 조선시대 다양한 색체의 컬러를 사용하던 첫 화가들 중 한사람이다. 신윤복의 풍속화들(기녀(妓女), 무속(巫俗), 주점, 시정 촌락… 등)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