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텅 빈 감정의 파장


<Paper>

어쩌다보니 서른, 종이에 파묻혀 일하는 것이 전부인 설아에게 나타난 달콤한 청년 웅이. 하지만 그마저도 곧 피로하게만 느껴지고, 두통에 괴로워하며 의사가 내렸던 상념을 지우는 처방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J에게>

사소한 오해로 걷잡을 수 없이 멀어졌던 우리. 단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존중해주는 것이 전부였던 그 시간이 흐르고 허심탄회하게 편지 쓰듯 풀어놓는 J에게.


<트리코틸로마니아>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뽑는 질환을 가지고 있는 소화와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형우. 위태롭게 이어지는 관계를 끈질기고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보지만 목적 없는 릴레이 경주 끝엔 짙은 어둠뿐이다.


<클로르프로마진>

쳇바퀴 돌듯 무료하게 반복되는 끝나지 않는 하루. 자존감을 하락시키는 일터, 유대감 없는 인간관계 속 생과 사의 문제. 부담스럽기만한 이 하루를 어떻게든 처분하고 싶다.


<앙상세>

아무런 욕망이 없는 무의 존재 수. 장을 통해 알게 된 친구들에게서 배우는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세계를 통해 수의 인생에도 욕심이 생긴다. 살아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한 홀로서기 시동.


모든 것이 권태롭기만 한 일상, 그리고 피로가 느껴지는 인간관계. 

쳇바퀴 돌듯 이어지는 이 하루의 끝은 어디인지, 채워지지도 끊어지지도 않고 삶을 짓누르는 허무의 무게들이 버겁기만 하다.

이 책에 실린 4편의 짧은 글과 1편의 조금 긴 글은 너무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감정의 근원을 찾아 담담하게 묻는다.

비록 그 답이 모두에게 듣는 착한 위로도, 무조건적인 패기 넘치는 응원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펼친 당신의 클로르프로마진(CPZ, 최초의 신경안정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속으로■


설아는 언젠가부터 아주 조그만 일을 하는 데도 결심이 필요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결심, 그리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결심. 그 자잘한 결심들이 설아를 궁지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르겠다.

-<Paper> 중에서


그냥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 나는 단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감정도 존중해 주는 것을 굳이 다른 감정으로 분리시켜 이해를 해야 하는지 싶었다.

-<J에게> 중에서


손끝으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머리카락이 뽑히는 감각. 영역을 넓히며 열꽃을 피우는 두피의 열감. 차츰차츰 고요해지는 마음속 술렁임. 피가 돌지 않아 곧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팔을 떨구자 찌릿찌릿한 느낌이 천천히 팔뚝을 훑고 지나간다.

-<트리코틸로마니아> 중에서


무엇이 날 자꾸만 멈추게 하나, 무엇이 날 이토록 주저하게 하는가. 아깝거나, 두렵거나, 실패했던 기억에 길들여진 정신이거나….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는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호소해 본다.

-<클로르프로마진> 중에서


수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설레지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있음을 인정한다. 기왕 숨을 쉬고 있을 거라면 살아있고 싶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수는 지금부터 소리도 없이 불어날 눈덩이를 뒤로하고 바삐 걷는 사람들과 대형을 맞춰 걷는다. 곳곳에 차갑다 못해 깨질 듯한 향기를 남기며.

-<앙상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