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성의 회복


그의 시가 지향하는 것은 원래 시의 고향이었던 주술과 마법으로서, 시를 만든 그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원래 주술은(나중에는 마법이 되고 마술이 되었다) 누군가와 무엇을 축복할 수도 있고, 누군가와 무엇을 저주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주술은 우리의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생명을 지키거나 생명을 없애는 것, 그것이 바로 주술이었다. 그런 힘들을 향한 믿음은 그의 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손녀 윤이는
캐들거리는 웃음소리로
추석 무렵의 수성못 들안길과
이상화의 빼앗긴 들과 그의 침실과
갖고 놀던 장난감 자동차와
아내의 얼굴과
아침 배달 조간신문과
멍멍이와 침대와 소파와
훈민정음 해례본과
여진족이 쓰던 문자와
그리고 손녀가 머물던 빈자리까지 모조리
―「마이다스의 손」 부분


원시성이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손녀 윤이”와 “강아지 베리”처럼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들은 삶 자체를 지배하고 삶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지만 우리가 이성과 계몽과 도덕의 눈을 뜨고 보면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연구하는 “훈민정음”이나 “여진족이 쓰던 문자”는 그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캐들거리는” 손녀의 웃음소리는 한 번 만에 이 모든 것을 완전 무장 해제할 수 있다. 이런 순간은 우리가 선잠에서 깨어 어렴풋이 감지하거나 놀이와 장난 가운데서, 또는 꿈 같은 원시성의 중심에서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베를렌이 “중얼거림”이라고 표현한 것, 박수무당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어머니의 자장가 사이에서 꿈틀대는 것들이 바로 원시성이다. 그러므로 시는 시인에게 삶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그 어떤 충동 같은 것들을 겨냥하고 있다.

시전문지 13월 호에 실린 나의 시를 아무리 읽어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누가 썼는지도 모르겠다. 시가 이데아라고? 구원이라고? 시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시의 위의(威儀)라고? 한 때의 상처와 마주했던 언어라고? 아팠던 상흔의 기억이라고? 오랫동안 단어들에 익숙한 한 사람이 단어 옆에 단어와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시에 익숙한 사람이 시 옆에 시와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값비싼 종이에 인쇄된 먹으로 깊이 눌러 찍어낸 내 시의 가려운 혓바닥, 13월의 시를 나는 찢어버린다.

그러자 그 자리엔 푸른 나무 한 그루가 솟아났다. 영성의 땀방울이 찢어진 종이 잎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13월의 시」 전문


그렇다. 시인이 구상하는 원시의 축제는 “찢어진 종이”에서 시작될 것이다. 모든 기존의 것을 파기할 때 우리는 원시의 푸른 그림자, “푸른 나무 한 그루”를 꿈꿀 수 있고 종이 뒤에 꿈틀대는 원시의 축제를 예감이라도 할 수 있다. 시인은 꿈꾸는 자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도회의 콘크리트 아파트를 뒤엎어 보리밭으로 만드는 반란이 아니고서는 도대체 원시성의 회복은 어려울 것 같다. 계몽의 절대명제 아래 시를 “이데아”라 하고, “구원”이라고 하는 동안 우리는 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낭만주의적 감정으로 원시축제가 회복될 수도 없으며, 더구나 현대인의 기계화되는 체계화로 삶이 원시성을 회복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시에 익숙한 사람이 시 옆에 시와 나란히 포즈를 취하는” 일밖에는 되질 않는다. 사물의 뒷부분을 오랜 시간 응시하고 있는 이상규 시인은 자신의 언어 거물망에 살아 있는 인간 존재의 무심한 파편들을 언젠가 건져 올릴 날이 오리라 기대하고 믿는다.